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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백 쉰 일곱번째 이야기) 하나님이 주신 연락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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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손우성 강도사 댓글 0건 조회Hit 1,447회 작성일Date 16-05-01 16:48

    본문

    雪中訪友人不遇(설중방우인불우)

    李奎報(이규보, 1168-1241)

     

    雪色白於紙(설색백어지) 눈빛이 종이보다 희기에

    擧鞭書姓字(거편서성자) 채찍을 들어 성명(姓名)을 써두네.

    莫敎風掃地(막교풍소지) 바람이 땅을 쓸어버리게 하지 말고

    好待主人至(호대주인지)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려주었으면 좋겠네.

     

    고려 시대 이규보라는 시인이 지은 한시입니다. 눈이 오는 날 친구를 만나기 위해 미끄러운 눈길을 헤치고 어렵사리 친구의 집에 찾아왔으나, 친구는 없었습니다. 전화도 없고 카톡도 없는 시대였기에 친구가 어디에 갔는지 언제 돌아올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얗게 펼쳐진 눈밭을 보며 그는 말채찍을 들고 종이에 글씨를 쓰듯 자신의 이름을 눈밭에 적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이름이 지워져서 친구를 향한 그리움을 전하지 못할까 걱정하며 바람에게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려주기를 바라는 모습입니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친구 집에 찾아왔지만 친구는 없었고, 연락할 방법이 없어 눈 덮인 땅에 채찍으로 자신이 왔다간 것을 알리는 모습. 지금 시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헛수고하며 시간낭비 에너지낭비 한 것이겠지만, 이런 모습은 인간 삶의 낭만이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에 잔잔한 애틋함의 여운을 남깁니다.

    디지털 시대에, 문명의 이기를 잔뜩 누리고 사는 현대사회의 특징은 놀랍게도 개인주의와 고립입니다. 서로 연락할 수 있는 편리하고도 단순한 수많은 방법이 생겼지만, 그래서 사람들과 더 연락을 많이 하고 인간관계가 폭넓고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각각 더욱 고립되어가고 인간관계는 점점 더 삭막해져 갑니다. 전화기에 전화번호 저장은 많이 되어있는데, 그 수많은 전화번호를 보며 인간관계의 풍족함을 느끼기보단, 마음을 툭 터놓을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에 관계적 빈곤을 느낍니다. 관계라는 것이 편리함에 의해 깊어지는 것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문득,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돌아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후, 죽으셨거나 사라지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셔서 우리와 관계를 맺고 교제하고 싶어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연락하고 지낼 수 있도록 기도라는 수단을 주셨습니다. 창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께 연락할 수 있다는 것은 영적으로 참 신비로운 일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연락하는 이 방법은 참 편리합니다. 다른 어떤 도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 마음에 드는 생각을 하나님께 아뢰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잘 기도하지 않습니다. 편리하다고 해서 하나님께 자주 연락하고 지내는 것이 아니라,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고립되어 가고 그 관계는 소원해집니다. 그리고 현대사회의 문화 속에 젖어 있는 우리의 습관은 우리의 마음을 점점 더 삭막하게 만들고 관계의 중요성을 잊도록 만드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눈빛이 종이보다 희어서 눈 위에 편지를 쓰는 이런 간절함과 애틋함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기도라는 연락 수단은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기계적이지 않고 인격적입니다. 바위 속에서 피어난 꽃과 같이, 이 삭막한 현대사회 속에서 변하지 않는 기도라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하나님께 연락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해나가면 좋겠습니다. 한동안 연락을 안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면, 지금 용기를 내어 하나님께 기도로 연락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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