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다애교회 All Love Church
로그인 회원가입
  • 칼럼
  • 칼럼

    칼럼


    이백 쉰 세번째 이야기) 노아

    페이지 정보

    작성자 오정세 댓글 0건 조회Hit 1,414회 작성일Date 14-03-31 08:26

    본문

    노아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대했던 영화 노아가 마침내 개봉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우리가 기대했던 노아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저도 과연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 청년 리더들과 함께 단체 관람을 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니 분명 성경을 왜곡한 부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를 테면 타락한 천사들이 방주를 만드는 것을 돕는 장면, 노아의 자부들이 처음부터 방주에 타지 않은 장면,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을 받았다는 매우 분명한 성경의 구속 원리가 생략된 점 등. 제가 내린 결론은 노아는 성경과 무관하며 성경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상업 영화라는 점입니다. 

      이 영화에 대한 기독교인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듯 합니다. 첫 번째 반응은 “노아는 반기독교 적이고, 비성경적이므로 보아서는 안된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도전이고 위협이다.” 라는 반응입니다. 두 번째 반응은 “노아는 그저 영화이고 성경은 성경이다. 진리인 성경을 가지고 뭐라 하든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반응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로 확장시켜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기독교와 문화는 어떠한 관계인가하는 문제이지요. 일찍이 이 문제를 연구한 리처드 니버는 『그리스도의 문화』(1951)에서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를 다섯 가지로 분석했습니다. 이 유형을 다시 요약하면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 대립유형
      이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가 서로 대립적인 관계이므로 양자택일로 이해하는 관점입니다. (창 12:11;마 6:24;요일 2:15,17) 3세기 이전의 초대 교회들은 문화(당시, 로마 문화)에 대하여 대립적인 태도를 보였고, 교부 터툴리안은 “신자의 투쟁의 대상이 자연이 아니라 죄악으로 가득한 문화”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문화를 떠나서 존재할 수 있다고 비판하고 또 그렇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지금도 도시를 떠나 농촌 지역을 살면서 문명을 도외시하고 사는 퀘이커(Quaker) 교도와 메노나이트들(Mennonites), 아미쉬(Amish)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2) 일치유형
      이 유형은 복음이 기존의 문화와 사회가 열망하는 바를 완성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환영하는 입장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문화를 해석하고, 문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위격에 일치된다고 주장하며 그리스도를 문화의 영웅이요 이상의 실현자로 평가합니다.(마 11:19; 로마서 13:1) 하지만 이들은 종교적 혼합의 위험성을 안고 있으며 문화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을 하게 됩니다. 특히 많은 기독교인 젊은이들이 문화의 수동적 소비자가 되어 교회 안으로 잡다한 문화를 끌어들이는 것은 큰 위험입니다. 

      (3) 변혁 유형
      이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는 서로 대립도 일치도 아니라고 이해합니다. 문화는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인간의 죄로 인해 세상이 타락하게 되었을 때 함께 타락하였기에 문화를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통해 새로운 변혁의 대상으로 이해합니다. 초대 교부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가르침에 영향을 많이 받은 사회일수록 좀 더 온전히 공의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으며 종교개혁자 존 칼빈도 “하나님은 창조주일 뿐 아니라 통치자요 보존자이시기 때문에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것들을 보존하시며 주관하시며 교회는 사회생활, 정치생활, 경제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활성화하는 누룩이 되어야 한다.” 고 말함으로 이 입장을 지지했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유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노아와 같은 영화를 볼 때 ‘저건 우리와 무관한 이야기’로 치부하는 것은 문화 대립적인 태도와 같습니다. 또는 지나치게 몰입하여 한 장면 한 장면을 비교하며 ‘기독교에 대한 모독’으로 보는 것은 그리스도와 문화를 동일선상에서 이해한 일치 유형적 태도와 같습니다. 우리는 반문화주의도, 문화일치주의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문화를 떠나 살아서도 안 되지만 문화에 젖어 문화가 말하는 거대 담론에 지배를 당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문화 변혁적 태도를 지녀야 하며 이를 위해 분별력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의 성도들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나아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토록 하라”(롬 12:2)고 말했습니다. 문화 변혁은 새롭게 태어난 사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문화에 대한 판단력을 가지고 살아야 하며 우리의 판단력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분명한 세계관이 밑거름이 되어야 합니다. 바른 그리스도적 세계관을 가지고 문화를 비판적으로 수용할 때 우리는 우리가 속한 그 곳에서 문화 변혁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오정세 전도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