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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백 마흔 일곱번째 이야기) 영광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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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안종빈 댓글 0건 조회Hit 2,330회 작성일Date 14-02-25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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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의 무대


    지금 러시아 소치에서는 세계의 축전인 동계올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4년간 혹은 더 긴 시간을 치열하게 훈련한 대한민국 선수들이 그들이 지닌 모든 것을 쏟아내는 것을 보며 우리의 마음 속에 감동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감동이 비단 대한민국 선수에 대해서만 해당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무대와 순간을 위해 훈련한 선수들의 땀과 눈물이 보여지기에 우리도 감동하고 또 감격합니다. 한 나라를 대표해 온 한 명의 선수, 55세의 고령의 몸으로 참가하는 선수, 그리고 6회 연속 참가하는 선수를 볼 때에 우리는 메달이나 순위보다 더 본질적인 올림픽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학창시절 즐겨보던 농구만화에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감독님에게는 영광의 순간이 언제였나요? 저는 바로 지금입니다”. 이 대사처럼, 다시 한 번 묻게 됩니다. 영광의 순간은 언제였나요? 혹은 언제일까요? 어찌 보면, 영광의 순간은 모두가 집중하는 결승전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수 있는, 그 모든 삶이 다 드러나는 순간인 것 같습니다.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올림픽이 바로 이런 영광의 무대입니다.


    복음서를 읽을 때에 ‘아직 예수가 영광을 받지 못하여서..’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예수님에게 영광의 순간은 호산나 찬양을 받으셨던 예루살렘입성의 순간이 아니고 처절하게 죽임과 조롱을 당하신 십자가위에서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드러나고 그 분의 생명을 모두 쏟아 부으신 그 십자가가 예수님에게는 영광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교회에 쓰는 편지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며 매일 그 분처럼 십자가위에서 죽어야 할 것을 설교합니다.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그 분처럼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드리는 삶을 살아간다면 매일의 삶이 영광의 무대인 것입니다. 이 삶은 성적과 결과보다 더 큽니다. 어찌보면 ‘영광’이라는 명사와 잘 어울리는 형용사는 ‘화려함’이 아니라 ‘신실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영광의 무대에는 많은 관중과 화려한 조명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허다하게 많은 증인이 우리의 삶을 응원하고 격려하고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삶의 무대에서 영광의 삶을 신실히 살아갈 때에, 영광의 주님께서 우리를 안아주시고 위로하시며, 그 분의 약속처럼 우리에게 상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다애교회 선수분들을 응원합니다!  


    - 안종빈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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