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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백 네번째 이야기) 구원의 확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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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오정세 댓글 0건 조회Hit 1,572회 작성일Date 13-04-21 16:34

    본문

    구원의 확신 (1)

    제가 중등부 수련회 때 경험한 일입니다. 강사 목사님께서 오늘 밤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니?”라는 질문이 저에게 매우 두렵게 다가왔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아니요였습니다.

    누구나 한 번 쯤 고민해 보았을 문제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천국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스스로가 구원의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성경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 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백성이 누려야할 특권이자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일찍 소유할수록 하늘의 축복을 조금 더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몇 주간 나누어서 이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먼저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도록 만드는 잘못된 인식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구원의 확신은 회심한 날짜를 알아야 가능하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 위에서 회심한 것처럼 갑작스럽고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구원 받았다는 그 날을 매우 의미 있는 날로 여겨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의 확신에 있어서 회심의 날짜와 시간을 기억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날짜와 시간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얼마든지 구원의 확신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회심한 날짜를 기억하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박옥수의 구원파와 같은 이단들이 이러한 날짜를 강조하여 이 날을 제 2의 생일로 여깁니다. ‘나는 회심한 날짜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인식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2) 앞으로 나오면 구원을 받는다?

    대형 집회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설교 후 늘 구원받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거나 앞으로 나오게 합니다. 사실 이러한 방식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의 확신을 들도록 애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집단적으로 자리에 일어나는 것으로 구원의 확신을 소유했다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단회적인 감정의 고조와 구원의 확신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의 확신은 우리의 삶 속에서 점차 견고하게 세워져야 합니다.

    (3) 우리의 행위를 보니 구원 받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구원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는 구원의 확신의 기준을 우리의 행위에 두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돌아보니 결코 구원을 받은 것으로 여기기엔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적 상태에 따라 믿음이 흔들립니다. 허나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입니다. 칼빈은 우리의 믿음은 늘 공격을 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늘 평온함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구원에 대한 확신과 연결 지어 생각할 만한 근거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일수록 시련을 통해 더욱더 견고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진정한 구원의 확신을 보장해 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한 온전한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시고 구원의 여부를 결정하지 않으십니다. 오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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